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로스 1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테오도로스 1세는 [[동로마 제국]]의 [[귀족]] [[가문]]인 [[라스카리스 가문]]에서 태어났다. 그는 [[1199년]] [[로마 황제|황제]] [[알렉시오스 3세]]의 딸 [[안나 앙겔리나]]의 [[재혼]] 상대로 선택되어 황가의 일원이 된다. 가족관계로는 [[이사키오스 2세]]의 조카사위, [[알렉시오스 5세]]의 동서가 된다. 또한 형제로는 알렉시오스 5세가 폐위가 된 후 [[참칭 황제|황제를 자칭했던]] [[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]]의 동생이 된다. [[1204년]] [[제4차 십자군 원정|십자군]]이 [[콘스탄티노폴리스]]를 함락시키자 [[로마 제국]]은 공중분해되어버렸다. [[트라키아]]로 도망가 반격을 준비하던 황제 알렉시오스 5세는 선황제 [[알렉시오스 3세]]의 사위가 되어 연합하는 듯 하였으나 제대로 뒤통수를 맞아 [[참칭 황제|칭제범]]으로 몰려 눈이 뽑히고 십자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. 수도를 장악한 십자군은 [[라틴 제국]]을 세워 [[그리스]] 일대를 장악하였고, [[이피로스]]와 [[트라페준타]] 일대에서는 도망친 귀족들이 건국한 군주국들[* [[이피로스 전제군주국]]과 [[트라페준타 제국]]]이 발흥하였다. [[아나톨리아]] 서부는 [[무정부 상태]]에 돌입해 [[룸 술탄국]]에게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. [[1204년]] [[니케아]]에 터를 마련한 테오도로스는 [[비티니아]]와 미시아 일대를 정리하고 아나톨리아 서부 일대로 나아갔다. 같은 해에 [[알렉시오스 1세(트라페준타 제국)|알렉시오스 1세]]가 건국한 뒤 [[흑해]] 연안을 따라 비티니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[[트라페준타 제국]]을 저지하였으나, 그해 말 [[보두앵 1세(라틴 제국)|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]]와 포이마네논에서 격돌하여 대패했다. [[행정]] 체제도 [[동로마군|군대]]도 [[히피르피론|돈]]도 없는 껍데기 상태에서 [[오합지졸|급조한 군대]]만으로는 당연한 결과였고, 라틴 제국군이 [[마르마라 해]] 연안을 전부 장악하고 [[수도(도시)|수도]] 니케아 근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. 그야말로 대위기였다. 구원은 뜻 밖의 방향에서 나타났다. [[불가리아 제2제국|불가리아 제국]]의 [[차르]] [[칼로얀]]이 라틴 제국을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의 주력을 격파하고 황제 보두앵 1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. 적의 예봉이 꺾여 시간을 벌게된 테오도로스 1세는 서둘러 국가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. 소아시아 서부의 [[이오니아]] 지역을 통합했으며, 붕괴한 행정제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웠고, 정치와 조세의 모든 제도를 짧은 시간 내에 재건하였다. 이전 [[동로마 제국/작위 및 관직|동로마 제국의 관직]]이 전면 복구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테오도로스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.[* 국가의 관직과 제도는 매우 복잡하고 체계적이어서 기억만으로 복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. 테오도로스 1세의 천재성이 빛나는 부분이다.] [[1205년]]에는 다시 [[라틴 제국]]의 위협이 닥쳤다. 2대 황제인 [[앙리(라틴 제국)|앙리]]가 아드라미티온을 점령, 다시 공세를 걸어온 것이었다.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양측은 맞붙었으나 또 패배한 니케아 측은 불가리아와 연합, 공동의 적인 라틴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고 그 해 4월 불가리아가 후방을 침공하자 라틴 제국은 물러나게 되었다. [[1206년]] [[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]]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니케아에 총대주교좌를 이전하고[*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된 이후 요안니스는 디디모티호로 피신했고 테오도로스는 피난간 요안니스에게 니케아로 와 줄 것을 요청했으나 요안니스는 고령을 이유로 사양했다.], [[프리기아]] 지역을 통합하였다. 이 무렵 [[룸 술탄국]]은 또 다시 니케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으며, 테오도로스는 라오디키아, [[안탈리아]] 등이 룸 술탄국 측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. [[1208년]],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1년 넘게 공백이던 총대주교좌에 새 총대주교로 미하일 4세를 선출하고[* 테오도로스와 [[정교회]]는 [[교황]] [[인노첸시오 3세]]에게 정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교황을 이를 무시하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[[라틴 총대주교|라틴 총대주교좌]]를 설치했다. 결국 테오도로스와 정교회는 [[가톨릭]]과의 타협 없이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한다.] 새 총대주교의 주관으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. [[1211년]] 전 황제이자 테오도로스 1세의 장인인 [[알렉시오스 3세]]가 니케아에 왔다. 알렉시오스 3세는 니케아 궁정에 선임황제로써 자신의 입지를 요구했는데 거부당하자 [[룸 술탄국]]으로 도주, 니케아를 칠 것을 주문했다.[* 테오도로스 1세 입장에서 본다면 거절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알렉시오스 3세는 이미 다른 사위였던 알렉시오스 5세의 뒷통수를 쳤던 경력이 있었고(물론 알렉시오스 5세가 이전부터 보인 행보에 대한 자업자득이긴 했다.) 알렉시오스 3세가 살아있을때 황제를 자칭했기에 제위를 내놓아도 목숨이 보장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.] 룸 술탄국의 공격 소식을 접수한 테오도로스 1세는 1200명의 [[그리스인]] 병사와 800명의 라틴인 기사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. [[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]][* Ἀντιόχεια τοῦ Μαιάνδρου. 현 터키 [[아이든]] 주 쿠유자크(Kuyucak).]에서 룸 술탄국의 군대를 만난 니케아군은 고군분투 속에 적군을 격파했다. 테오도로스 1세 본인도 전장 한복판에서 분전했다. 이 때 테오도로스 1세가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와 [[일기토|직접 칼싸움을 벌여]] 술탄을 전사시켰다고 한다.[* 황제와 술탄의 칼싸움은 당대 역사가인 [[니케타스 코니아테스]]의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.] [[1211년]] 말 안티오키아 전투로 약화된 니케아를 노리고 라틴 제국이 공격했다. [[트라페준타 제국]], [[룸 술탄국]]과 협정을 맺어 니케아 제국을 고립시킨 후의 공격이었다. 린다코스 전투에서 니케아군은 라틴 군대에게 패배하였고 결국 협상의 결과로 미시아가 통째로 넘어갔으며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일부가 넘어갔다. [[1212년]] 라틴 제국과 룸 술탄국 전선이 안정되자 테오도로스는 [[트라페준타 제국]]을 공격했다. 시노피 이서의 영토가 수복되었으며 트라페준타 측은 약체화되었다. 이후의 평화를 기회로 테오도로스는 군사력을 재건하였고, 라틴 제국과는 결혼을 빌미로 관심을 계속 돌려두다가 [[1220년]]에 라틴 제국을 향해 공세를 취했다. [[1221년]]에는 후계자로 사위 [[요안니스 3세]]를 택했다. 지지를 확보하고 형제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유력자들을 소집하여 투표과정을 거쳤고, 이를 통과한 요안니스는 충분한 [[정통성]]과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. 그리고 요안니스 역시 테오도로스의 기대에 걸맞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면서 이는 테오도로스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선택이 되었다. 1221년 말 테오도로스 1세가 사망했을 때, [[니케아 제국]]은 인구 300만 명의 [[지역강국]]이 되어 있었고 그가 증원한 군대 8천은 [[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|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]]의 기반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